[우리는 10년 차이] 술과 국수 한 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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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남한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 정착 이야기

< 우리는 10 년 차이 >

박소연 : 지난 시간부터 음주 운전과 남북의 술 문화에 대해 얘기 이어가고 있는데요, 당시 시세로 술 한 병이면 네 식구가 먹을 수 있는 양의 국수를 살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술 먹는 아버지가 미웠죠.

이해연 : 우리 집도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대책을 생각했어요, 그게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엄마도 함께 마시는 거죠. 아버지가 하는 것처럼 엄마도 그대로 해줍니다.


박소연 : 한국에선 그걸 거울 치료라고 하죠.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잖아요.

이해연 : 맞아요. 당신도 하면 나도 한다,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박소연 : 12년 전에도 그런 용감한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웃음) 그리고 왜 북한 남자들은 술을 먹으면 문이라고 생긴 곳엔 물건을 다 던졌을까요?

이해연 : 주로 재떨이가 가장 많이 날아가죠. (웃음)

박소연 : 아파트에서 어떤 집이 싸우면 어르신들이 그러죠. "야 그 아파트 밑에 지나가지 마라, 좀 있으면 사람도 던지겠다" (웃음) 그러면서도 항상 그랬습니다. "술을 먹어서 그렇지 정신이 멀쩡할 땐 온전하다". 술을 그렇게 되도록 먹는 게 문제란 말인데요.


이해연 : 제가 지금은 술을 조금 마셔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술을 마셨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걸요. 그리고 지금은 북한에서도 술을 마셨다고 실수를 관대하게 봐주지 않습니다.

박소연 : 12년 전에도 '술은 먹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은 했지만 '오죽하면 마셨겠냐, 사는 게 힘드니까 그랬겠지' 이런 생각들이 더 많았죠. 다행히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술값이나 쌀값이 비슷하니까, 여성들이 항변하기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남편이 술 먹으면 감히 싸우지도 못했어요. 근데 '고난의 행군' 이후부터는 여성들 목소리가 남성들과 비슷해지는 거예요. '그 술값으로 가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데, 당신도 사람이냐'며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이웃들은 저 집 아주머니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반면에 어떻게 남편에게 저렇게 말대꾸하냐 하기도 하고... 주로 어르신들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해연 : 요즘 시부모님들이 그런 말 하면 남들이 다 욕합니다. 남자들은 술 먹고 주정 부려도 된다는 법이 어디 있냐는 거죠. 그리고 현실적으로 북한에서는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나가서 돈을 벌고 경제적으로 책임도 지고, 애 키우는 것도 엄마 손이 많이 가고, 집에 와서도 요리를 비롯해서 엄마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보니까 여성분들이 이제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린 거죠. 그래서 이제는 맞서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그런 걸 보면서 정말 잘 변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시원하다는 생각했어요.

박소연 : 그렇게라도 투쟁해야 우리가 같은 여성으로서 덜 분하잖아요. 하지만 북한에도 부정적인 술 문화만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젊은이들이 모여서 즐겁게 술 마시는 문화도 있지 않습니까?

이해연 : 당연히요. 북한에는 보통 누구네 집에서 모이잖아요? 증폭기 큰 거 있는 집이나 좀 큰 집에서 모여서 놀아요. 돈을 모아서 술도 좀 사고 같이 노래도 부르고... 그러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연애도 하고 그러죠.


박소연 : 술은 어떤 분위기에서 누구와 함께 같이 마시느냐가 중요한 거죠. 우리 때도 젊은이들이 즐겁게 술 마시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지나친 게 항상 문제인 거죠. 남한에 와서 술 때문에 갈라서는 탈북민 부부도 많이 봤습니다. 우리가 보통 남한에 오면 아파트에 사는데요, 제가 잘 아는 부분도 초기에는 아파트가 떠나가게 남편이 술을 먹으면 싸웠답니다. 술을 더 사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결국 아내가 목숨 걸고 여기까지 와서 가정이 쪼개지길 바라냐며 당신, 바뀌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선언했고 남편이 직장을 다니며 변했답니다. 여기는 그렇게 술을 마시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안 거죠. 지금은 저녁에 오붓하게 창문 열고 맥주 한 잔에 오징어를 먹는데요.

이해연 : 부부 싸움은 남한이나 북한이나 다 하죠. 그런데 남한에서는 그런 집을 어쩌다 한 집이라면 북한은 옆집, 뒷집, 앞집 할 것 없이 흔하게 볼 수 있다 보니까 잘 못 됐다는 인식이 없는 거죠.


박소연 : 북한말로 '도토리 키재기'였죠, 거의 모든 집이 비슷하니까요. 근데 반대되는 재미있는 사례도 있는데, 탈북자 여성이 남한 남성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이분은 또 술을 전혀 안 마신 답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싸우니까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고...(웃음) 그래서 오히려 짜증이 나더라는 얘기도 하시더라고요.

이해연 : 남한에서 사니까 가능한 불평입니다. (웃음) 남북한이 술에 대한 인식이 너무 다른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옛날 장군들도 주량이 많다고 하면서 자고로 남성은 술을 마셔야 하고, 술을 먹는 남성은 용감하고 대범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박소연 : 주색을 겸비해야 남자라고 하죠. 그런 인식이 좋지 않습니다. 술을 안 먹고도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북한의 문화는 술을 안 먹는 사람이 극히 적으니 술 안 먹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거예요.

이해연 : 남한 사람들이 즐겨먹는 술, 소주가 16도 정도인데요. 옛날에는 25도였다고 해요. 이렇게 낮아진 이유가 사람들이 독한 술을 더 이상 안 찾는다는 거죠. 적당한 도수의 술을 적당히 마시기... 북한처럼 남편들이 술을 마시면 여기선 이혼 사유입니다.


박소연 : 맞아요. 북한은 지금도 저녁에는 무조건 술인가요? 12년 전엔 골목마다 술병 들고 심부름 가는 아이들이 부딪칠 정도였습니다. (웃음)

이해연 : 남한은 편의점이나 가게에 술 사러 갈 때 어린애가 가면 절대로 안 팔고요. 설사 성인으로 보인다 해도 반드시 신분증 검사를 해요. 성인이 되어야만 술을 살 수 있는 거죠. 이것도 너무 좋습니다.


박소연 : 남한은 19세 이하면 술을 팔아주지 않습니다.

이해연 : 북한에는 걸어 다니고 손에 병을 깨지 않고 들 수 있는 나이면 술 심부름을 한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한 6살 때부터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저는 정말 술 마시는 남자는 안 만날 거라며 술에 대해 멸시를 했단 말이죠. 그런데 남한에 와서는 선배님은 한강에서 라면에 맥주 한잔하는 게 행복이다 그러고 저는 TV 보면서 맥주 한 잔 하는 게 진짜 행복이라고 말하잖아요. 이렇게 변하게 된 이유가 뭘까요?


박소연 : 저는 일단 술 가격에 대한 부담감이 없다는 게 큰 것 같습니다. 맥주나 소주 가격은 1병당 3.7달러 정도인데, 북한에서 3.7달러면 꽤 비싸다고 할 텐데 남한에선 로임과 비교해 그렇게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속상할 때만 마시는 게 술이 아니라는 것...


이해연 : 그렇죠. 5일 동안 정말 열심히 일하고, 쉬는 주말에 나를 위해서 술 한 잔 마시는 거죠.


박소연 : 또 남한에서는 가끔 국제 축구 경기가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큰 경기장에 모여서 관람하고, 식당이나 주점에서는 아예 큰 텔레비전을 켜놓고 응원하고 맥주를 마십니다. 저는 그런 날에는 집에서 치킨 반 마리를 배달시켜요. 거기에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TV 앞에서 실시간으로 응원하면서 먹는데, 한술 더 떠서 궤짝을 뒤져 빨간 옷을 꺼내 입어요. 남한에서는 2002년 월드컵 때부터 붉은 악마라며 빨간 옷을 입고 응원했어요. 북한에서 술을 마시면 속타는 얘기만 했어요. 남한에서는 좋은 추억을 맥주 한 잔에 담는 거예요.

이해연 : 얘기를 하다 보니 남북한의 술 마시는 이유도 참 다르네요.

박소연 : 북한은 힘들고 속상해서 술을 마시고 그러다 보니 더 힘들고 몸도 상하고... 어떻게 보면 술을 취하도록 마시는 게 슬픈 일입니다... 언젠가는 같이 모여서 한강에 나가 유리 맥주잔을 하늘에 들고 '단카이'(원샷)라고 외칠 날을 기다리며, 다들 술 조금만 드시고 건강하세요. 저희는 이만 인사드립니다.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녹음총괄, 제작: 이현주

에디터: 양성원

웹팀: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