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고양이 뿔 빼고 모든 게 다 있다는 북한의 장마당, 그런 장마당에서 파는 물건 하나만 봐도 북한 경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하는데요. 북한에만 있는 물건부터 북한에도 있지만 그 의미가 다른 물건까지, 고양이 뿔 빼고 장마당에 있는 모든 물건을 들여다 봅니다. <장마당 돋보기>, 북한 경제 전문가 손혜민 기자와 함께 합니다. 안녕하세요?
손혜민 기자: 안녕하세요?
진행자: 북한 장마당에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은 흔히 '빨간 돈가방'에 돈을 넣어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빨간 지갑은 재물운이 좋아진다고 해서 많이들 사용하는데요. 장마당 여성들의'빨간 돈가방' 안에는 과연 뭐가 들어 있을까요? 여러 나라 화폐가 들어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손혜민 기자: 북한에서 장마당 여성이라면 누구나 메고 있는 빨간 돈가방, 천으로 만든 작은 가방이지만 그 안을 본다면 명품 가방 샤넬 못지 않은 가치가 있습니다. '대가리'로 불리는 미국 달러는 물론이고요. 중국 위안화와 북한 국돈, 돈표까지도 칸칸이 들어있으니까요. '장마당 여성들의 개인 은행'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몸에서 항상 떼어 놓지 않고 심장보다 소중하게 간직하는 이유이죠.
빨간 돈가방은 1990년대 중순 이후 장마당이 태동하며 등장한 신상품인데요. 2024년 현재까지도 장마당 여성들이 가장 애용하는 최장수 상품의 하나입니다. 그러고 보면 재물운을 상징하는 빨간색의 의미가 북한에서 혁명전통으로 상징되고 있는 노동당의 빨간 깃발색과 교차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빨간 돈가방에 들어 있는 외화가 지역별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중국과 인접한 함북도와 양강도 등 북부 지역에서는 중국 위안화를 많이 사용하므로 해당 지역 여성들의 빨간 돈가방에는 미국 달러보다 위안화가 많습니다. 반면 세계 각국의 대사관과 영사관에 상주한 외교관과 무역대표들, 이들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평양과 인접한 평안도 내륙지역에서는 중국 위안화보다 미국 달러를 많이 사용합니다. 당연히 내륙지역 여성들의 빨간 돈가방에는 달러가 많겠죠. 중요한 것은 어디를 가나 북한에서 거래되는 화폐가 내화보다 외화가 많다는 점입니다.
진행자: 그렇군요. 현재 북한 장마당에서 많이 쓰이는 화폐가 달러와 위안화라고 하셨는데요. 지난해에는 북한 당국이 장마당에서 중국 화폐를 사용하지 못하게 강력 단속에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당국의 단속도 별 효력이 없는 걸로 봐야 할까요?
손혜민 기자: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려운데요. 외화 사용 통제가 작년에만 특별히 시행된 건 아니고요. 김정은 정부 집권 이후부터 반복되고 있는 시장화 정책, 다시 말해 시장을 장려하거나 통제하는 정책이 엇갈리고 있는 영향으로 보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화폐개혁(2009.11) 이후 외화 사용이 엄격히 통제되었죠. 2010년 1월 사회안전성(당시 인민보안성) 포고문을 통해 '공화국 영역에서 외화를 유통시키는 자들을 엄격히 처벌하라'고 공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2012년부터 달라집니다. 김정은 정부가 우리식경제관리방법에 대한 경제분야의 핵심 법령을 2014년까지 여러 번 개정하며 기업의 자율성이 대폭 강화된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기업의 자율성은 시장화 확대를 의미합니다. 당연히 기업과 시장 간 밀접하게 연계되며 달러와 위안화 등 외화 사용은 개인이 장사하는 장마당에서도 보편화되었죠. 양강도에서는 장마당 쌀 가격이 위안화로 표기되고, 평성과 순천 등 내륙에서는 신발 한 켤레, 옷 하나 가격까지도 달러로 표기되었습니다. 단가가 높은 토지나 살림집 거래는 말할 것도 없겠죠.
이런 와중에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됩니다. 이후 북한은 정면돌파전을 내세우면서 국가경제발전 5개년계획(2021-2025)을 다시 추진합니다. 기존의 5개년계획(2016-2020)의 실패를 자인하고 말이죠. 이는 시장경제에 의존하였던 계획경제를 복원하겠다는 의도입니다. 당연히 장마당 통제부터 시작되었고, 장마당 통제는 외화 사용 통제로 이어진 것입니다. 2019년 11월 외화 사용 통제가 최고지도자의 방침으로 하달된 배경입니다.
하지만 전국으로 확장된 장마당에서의 외화 거래를 통제하는 것은 효력이 없었죠. 그러자 북한은 지난해(2023) 사회안전성 포고문을 통해 외화 거래 주민을 엄격히 처벌하도록 공시했는데요. 올해도 역시 북한 장마당에서 외화 거래가 통제되고 있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화폐개혁(2009) 이후 장롱의 돈을 국가에 몰수당한 주민들 속에서는 국돈은 언제든지 휴지가 된다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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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그럼 장마당 여성들의 빨간 돈가방에 북한 돈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까?
손혜민 기자: 외화도 있고 북한 돈도 있습니다. 왜냐면 장마당에서 배추나 두부 등 기초 식품을 사려면 외화 사용 자체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두부 한 모 가격이 북한 돈 2천원(미화 0.11달러)인데, 현재 북한 시장에서 1달러 환율 시세는 북한 돈 1만7천원이죠. 상품가격 단가와 외화 단위가 맞지 않습니다. 센트 단위의 달러 잔돈과 1원 단위의 위안화 잔돈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북한 시장에 잔돈 외화는 부족합니다.
진행자: 그렇군요. 센트나 1원 단위의 위안화 잔돈이 북한 시장에 들어온다면 국돈 대신 외화 잔돈을 더 많이 썼을까요?
손혜민 기자: 그럼요. 두부로 다시 사례를 든다면, 북한 장마당에서 두부 한 모 가격이 2천원 아닙니까. 이 가격을 달러로 계산하면 1센트가 조금 넘습니다. 1달러 이하 잔돈이 없으니까 두부 장사꾼들은 두부 한 모 크기를 살짝 조절하여 1센트 가격으로 맞추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북한 장마당에 1달러 이하 잔돈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므로 두부처럼 단가가 낮은 식품은 국돈 거래가 편리합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있습니다. 신의주에서 생산한‘봄향기’ 화장품 한 조에 북한 돈 30만원인데요. 30만원을 달러로 계산하면 17달러입니다. 10달러와 5달러짜리는 그런대로 유통되니까 문제 없는데, 2달러 거스름돈이 없지 않습니까. 이때 판매자나 구매자는 거스름돈 2달러를 시장 환율로 계산하여 북한 돈으로 주고 받습니다.
10달러 이상 가격으로 거래되는 의류나 신발 등도 같습니다. 특히 TV나 냉동기, 세탁기 등 가전제품은 북한 돈으로 100만원 이상 가격이므로 외화 잔돈이 없어도 달러나 위안화로 거래됩니다. 뒤집어 말하면 소득이 높은 계층의 빨간 돈가방에는 외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있을 것이고, 배추나 두부 외 비싼 상품을 사지 못하는 저소득 계층의 빨간 돈가방에는 북한 돈, 즉 부스럭 돈이 상대적으로 많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덧붙여 말씀드린다면, 요즘 북한이 상점이나 양곡판매소 등 국영상업망에서 중앙은행이 발급한 ‘전성카드’ 사용을 장려하고 있는데요. 시중에 유통되는 자금을 중앙은행이 흡수하려는 의도죠. 이 말은 북한 주민들의 지갑 문화가 변화될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최근 북한이 합성비닐이나 가죽으로 만든 중국산 지갑을 수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는데요.
수입산 지갑은 현금을 많이 넣지 못하고 카드를 넣는 칸이 많죠. 대신 북한 내 유통되는 빨간 돈가방은 카드를 넣는 칸이 없고 현금을 많이 넣는 편리성이 있습니다. 이는 소비 계층에 따라 돈가방 선택이 달라지는 북한의 실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준비된 소식은 여기까지입니다. 함께해 주신 손혜민 기자 감사합니다.
<장마당 돋보기>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